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아프가니스탄 왕국 (문단 편집) === 아마눌라 칸과 왕국 선포 === 아프가니스탄이 영국으로부터 독립했지만 아직 풀어야 할 과제가 산적해 있었다. 여전히 아프가니스탄은 척박한 산골짜기 지대에 불과했고 딱히 국제적으로 경쟁력이 있는 산업이 있는 것도 아니었으며 그렇다고 인구도 많은 편은 아니었기 때문이다. 아마눌라 칸은 이에 대한 처방책으로 매우 급진적인 근대화 정책을 제시했다. 그는 1922년 4월 11일 872명의 부족 장로들의 재가를 받아 아프가니스탄 최초의 [[헌법]]을 제정했고, [[샤리아|샤리아법]]에 기초해 모든 국민들에게 동일한 권리와 자유권을 부여했다. 비록 형식적인 법령 제정에 불과했다지만 여전히 부족 체제를 벗어나지 못했던 당시의 아프가니스탄으로는 획기적인 변화였다. 특히 [[여성]]의 권리도 일부 보호했다는 점을 보면 현대 [[탈레반]]보다도 나은 점이 있었다. 아마눌라 칸은 이 외에도 수출 증대, 산업 다각화를 위해 애썼다. 교육에도 신경을 써서 남녀 모두를 위한 [[국제학교]]를 처음 지었으며 여성에게만 가해지던 엄격한 복장 규정을 폐지했다. 전국에 320여 개에 달하는 학교가 세워졌고, 초등교육을 의무화하는 한편 종교와 현대 과학을 가르치기도 했다. 특히 아마눌라 칸의 아내였던 소라야 타르즈 왕비는 여성 인권 진보에 관심이 많은 근대주의자였기 때문에, 아프가니스탄에 유럽식 사회질서와 문화를 이식하려 시도했다. 당연히 보수적이기 짝이 없는 이슬람계에서는 극렬히 반발했고 이 것이 결국 훗날 아마눌라 칸이 반란으로 쫒겨나는 원인들 중 하나가 되기도 했지만... 근대화적 유화책만 시도한 건 아니라서, [[절도]]를 저지른 범죄자는 [[새장]]에 가두어 공중에 [[아사|죽을 때까지 매달아놓는]] 극약처방을 내리면서 아프가니스탄의 범죄율을 크게 낮추는 성과를 내기도 한다. 이렇게 다방면에서 업적을 남겼던 아마눌라 칸은 마침내 1926년 칭왕하고 [[아프가니스탄 왕국]]의 건국을 선포했다. 이로써 아프간의 정치체제가 기존의 [[아프가니스탄 아미르국]]에서 왕국으로 전환된 것이다. 아프간 국왕으로 즉위한 아마눌라 칸은 바로 그 다음해에 [[유럽]] 순방을 떠났다. [[카라치]]에서 출발해 [[카이로]]를 경유해 푸아드 1세를 만났으며, 1928년에 [[이탈리아]]에 도착해 [[비오 11세]]와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3세]]를 만났다. 이후 [[프랑스]], [[벨기에]], [[독일]], [[영국]], [[폴란드]], [[러시아]]까지 갈 수 있는 웬만한 국가들은 죄다 돌아다녔는데, 왕이 이렇게 호화로운 순방을 즐기고 있던 동안 아프간 내부에서는 반란이 터졌다. 안그래도 아마눌라 칸의 급진 정책에 불만이 많았던 무슬림 국민들이 왕이 없는 틈을 타 대규모 봉기를 기획했던 것. 군대마저도 왕의 명령을 듣지 않는 지경에 이르자 결국 아마눌라 칸은 1929년 1월 퇴위하고 형제 [[이나야툴라 칸]]에게 양위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